성미경 Sung Mikyung 1965
생명을 담는 그릇: 성미경의 도예작업
그릇 만들기의 여성성
성미경은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응용미술학교를 다녔다. 흙을 가지고 작업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초기 작업은 물질로서의 흙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보인다. 마치 쇳덩어리 같은 작품들은 매우 남성적인 인상을 준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던 계기에는 도예라 하면 항상 장식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선입견을 깨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연 매끄러운 표면에 장식적인 그림이나 수가 놓여진 도자기 보다는 마치 무쇠덩어리 같은 흙덩어리를 빚어 가마에 소성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형태를 실험하는 조형적인 감각이나 물질성이 매우 중요했다. 어찌 보면, 도예일 수 없거나 전혀 도예 같지 않은 요소들에 매력을 느꼈고 상투적인 것과 결별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모색하는 실험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이 최근 완전히 대조적으로 보이는 일상적인 사물로서의 그릇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은 아마도 작가로서의 삶 이전에 가정의 어머니로, 한 예술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과의 만남에서부터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장식성이 배제된 그녀의 그릇들은 최근 많은 사람들이 주문하는 인기 상품이다.
생명을 담는 그릇: 화분
최근 성미경은 일본에서 “야생화 화분” 전시회를 열었다. 바위나 나무그루터기의 한 부분이나 동양의 분재형태에서 유추되고 자연에서부터 온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화분 안에는 일본 야생화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화분이나 꽃을 기르는 일은 하나의 취미를 넘어 삶의 묵상(黙想)이고 정신을 가다듬는 수양(修養)에 가깝다. 기르기 까다로운 난에 물을 주고 다듬는 행위는 그릇과의 절묘한 미학적 조화를 수반하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화분에 담겨질 식물을 고려해서 화분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진 화분에 맞히어 꽃을 심는 것일까? 어떤 것이 먼저가 되었든, 이 두 행위는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만 둘 다 빛을 발할 수 있다. 어떤 화분은 선의 흐름이나 질감이 거칠고 강해서 구석에 작게 피어난 야생화의 여린 꽃잎을 더 섬세하게 주목하게 하고 어떤 화분은 절제된 형태로 화려한 꽃잎의 선이나 빛깔을 더욱 화려하게 돋보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화분을 만드는 행위는 범주화되고 분절적인 모더니즘의 양식상의 예술분류와 비교해 보면 더 종합적이다. 많은 요소들이 서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예영역이 실용성의 기반을 넘어 예술로서 연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이 종합적인 요소를 어떻게 조절하고 절제된 나름의 미학을 제시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음식과 그릇
성미경은 최근 다기(茶器)나 일반 생활용 그릇들을 빗고 있는데, 이를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릇은 요리를 담당하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사용주체의 미학적 선택을 요구하는 여성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물이다. 동시에 그릇은 우리 몸을 형성하는 음식과 함께 우리식탁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장 많이 애용되는 사물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친근성과 일상성에 비해서 그릇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그릇의 형태와 미학에 대해서 고민하는 현대인들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보인다. 성미경은 딸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와 플라스틱 컵과 엄마가 빗은 도자기 그릇들을 함께 내 놓을 때 마다, 여지없이 엄마의 그릇을 선택한다는 고백을 들을 때, 기쁨을 느낀다. “식탁의 즐거움은 단순히 먹고 배 부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죠. 그릇에 관심을 가지다가 보면 식사도 시각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아요.”라고 성미경은 말한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도예가 이기 때문이라서인지, 그녀의 작업이 실용성을 근거로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예술을 다루기 때문인지, 그녀와 작업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여러 가지 카테고리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식물과 화분, 음식과 그릇, 모두가 주(主)가 되기보다는 부(副)가 되는 역할을 하는 엄마 같은 사물들이다.
디자인과 도예
디자인이나 도예나 모두 실용적인 목적을 충족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량생산을 통해 똑같은 형태를 반복 생산해낸 공업생산 품으로서 플라스틱 그릇은 도예가의 손에 의해서 매번 다른 형태로 빚어지는 그릇들과는 다르다. 1200도가 넘는 가마에서 구워지는 과정에서 터지고 깨지거나 하지 않고 살아남기 때문일까? 아니면 물레에서 도예가의 손끝에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성형되는 과정을 겪기 때문일까? 우리는 디자인적인 대량 상품과 도예를 차별해 낼 수 있다. “비싸더라도 좋으면 그 대가를 지불하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저 얻은 것들은 쉽게 버려지게 되죠. 작업하다가 잘못 만들어진 물건들을 그냥 주거나 하는 것은 도예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습성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요. 두 번 다시 얻을 것 같지 않은 마음으로 소중하게 쓰게 되면 그 물건과 오랜 시간 정이 들고 사용할 때마다 즐겁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가장 잘 만들어진 물건이 가장 잘 애용되는 그릇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그릇을 만들고 그릇을 고르는 그녀만의 취향이다. 여기서 편리성과 심미성은 하나로 통합된다.
“그릇은 다분히 정서적인 물건입니다. 써보면서 좋아지는 것도 있고, 세련된 것과 분위기가 맞는 그릇도 있고, 결국은 그릇자체로의 미학보다는 음식과 만나거나 그릇본연의 기능을 할 때, 그릇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릇은 비어 있는 것이죠. 채워져야만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성미경)
소통하기 위해 비우기
예술가의 아내로 남편의 작업을 옆에서 비평하는 조언자로, 또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대중들과 소통하고 소비시키는 생산자로 성미경의 하루는 분주하기만 하다. 남성적 예술행위들이 주류적 속성을 지니는 우리 사회에서 성미경의 작업은 일상적이고 여성적인 속성을 섬세하게 찾아낸다. 스스로 사용하면서 불편함을 최소화하고 멋스러움과 절제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데에 골몰하다보면 하루가 짧다. 최근 우리미술계가 관람객의 상실과 소통과 매개의 부재 때문에 미술품 거래가 위축되고 예술가의 창의적 성과들을 공유할 수 있는 소비체제를 만들기 위해 고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또 그것이 엘리트주의적 예술관과 자폐적인 미술소통 구조에서부터 연유된 것이라면, 성미경의 그릇들이 소통하는 경로를 세심하게 주목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전통과 단절된 서구식 현대예술이 전통예술의 소통 시스템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고 실용성을 넘어선 예술의 참 가치를 회복해 갈 수 있는 방법이다.
2005.10
백기영(전시기획)